유럽의 서쪽 끝,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꾸던 도시. 리스본은 찬란했던 황금기와 모든 것이 무너졌던 절망의 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슬퍼하기보다 좁은 골목에 파두(Fado) 선율을 채우고, 언덕마다 노란 트램을 띄우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1755년의 거대한 파괴가 남긴 상처를 이토록 아름다운 계획도시의 질서로 승화시킨 리스본의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리스본이라는 도시, 표면만 보면 절반만 본 겁니다
리스본은 15세기 대항해시대의 출발지였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 출항했던 벨렘 지구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관통하는 진짜 정서는 화려함보다 '사우다드(Saudades)'에 가깝습니다. 사우다드란 포르투갈어로 그리움과 아련함이 뒤섞인 독특한 감정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좁은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파두(Fado)의 선율을 들으면 그게 뭔지 몸으로 이해가 됩니다. 파두란 포르투갈의 전통 민요 장르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이 도시만의 음악입니다(출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운 아줄레주(Azulejo)도 그냥 지나치기 아깝습니다. 아줄레주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발전한 채색 타일 예술 기법을 말하는데,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은 기록물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걸 상 비센트 드 포라 수도원(Mosteiro de São Vicente de Fora)에서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사실 그날 아무 계획 없이 골목을 걷다가 입장 마감 시간이 30분도 안 남은 시점에 우연히 들어갔는데, 이게 세계 최대 규모의 아줄레주 컬렉션을 보유한 곳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라 퐁텐의 우화를 묘사한 타일 패널들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묘사의 정밀함이 놀라울 정도였고, 저는 잠깐 들를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폐관 직전까지 그 자리를 못 떠났습니다.
그날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수도원 옥상 테라스였습니다. 리스본 구시가지 알파마(Alfama) 지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석양이 지는 방향으로는 주황빛 지붕들이 물들고 반대편으로는 테주 강 위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일몰과 월출을 동시에 목격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상 조르제 성보다 관광객이 훨씬 적어서 조용하게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28번 트램, 무작정 타면 고생합니다
리스본의 28번 노란 트램은 구시가지를 관통하는 움직이는 문화유산이라고 불릴 만한 교통수단입니다. 하지만 이걸 아무 준비 없이 낮에 타려고 하면 줄 서다가 시간을 다 쓰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을 공략하라고 알려져 있는데, 제 경험상 12월 중순 저녁 8시에 마르팀 모니스(Martim Moniz) 광장에서 탔더니 대기 없이 바로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성수기였다면 달랐겠지만, 비수기 저녁 시간대는 생각보다 여유롭습니다.
비바 비아젬(Viva Viagem) 카드도 꼭 챙기시길 권합니다. 비바 비아젬 카드란 리스본의 지하철, 트램, 버스 등 대중교통을 통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로, 현장에서 현금으로 단건 티켓을 사는 것보다 비용이 절반 가까이 절감됩니다. 지하철역 자동발매기에서 구매 후 금액을 충전해서 사용하면 됩니다. 단, 저처럼 트램을 관광요으로 타고 다른 대중교통이 필요없으시다면 그냥 티켓을 현장 구입하셔도 괜찮습니다.
트램을 탈 때 알아두면 좋은 실전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리가 있으면 반드시 앉으세요. 경사가 심한 구간이 꽤 많고, 급정거가 불시에 발생합니다.
- 서 있을 경우 손잡이나 기둥을 반드시 잡고 있어야 합니다. 저도 한 번 급정거에 중심을 잃을 뻔했습니다.
- 진행 방향 왼쪽 창가 자리를 잡으면 알파마 골목 풍경과 테주 강 전경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 가방은 무조건 앞으로 메세요. 트램 안은 소매치기 발생 빈도가 높은 구간입니다.
저는 종점까지 타지 않고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 근처에서 내렸는데, 12월이라 광장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연말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테주 강을 마주 보며 강바람을 맞는 그 느낌은 글로 다 전달이 안 됩니다.
호카곷(카보 다 로카), 리스본까지 갔다면 여기는 꼭 가야 합니다
리스본에서 가장 강하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 바로 호카곷이라 불리는 카보 다 로카(Cabo da Roca)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지점으로,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가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고 표현했던 절벽입니다. 국내에서는 TVN 예능인 꽃보다 할배를 통해 한 번씩 소개된 적 있어서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저는 렌트카로 이동했는데 리스본 시내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가능하지만, 신트라(Sintra)를 경유하는 버스 노선을 이용해야 해서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방문하는 게 좋습니다. 포르투갈 국영철도 CP의 리스본-신트라 노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출처: CP 포르투갈 국영철도).
카보 다 로카에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강하기로 유명한데, 제가 갔을 때도 모자가 날아갈 뻔했습니다. 가볍고 날아갈 수 있는 물건은 차에 두고 내리시는 게 낫습니다. 절벽 위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다 정리되는 기분이 듭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대항해시대 선원들이 이 자리에서 미지의 바다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리스본 여행에서 카보 다 로카를 놓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시내 관광지만 돌다 오기엔 너무 아까운 곳입니다.
리스본은 짧게 훑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겹겹이 쌓인 도시입니다. 28번 트램에서 급정거를 버티고, 우연히 들어간 수도원에서 일몰을 만나고, 대륙의 끝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이 세 가지만으로도 리스본은 충분히 다시 오고 싶은 도시가 됩니다. 리스본을 계획 중이시라면 시내 관광지만 체크하지 말고 리스본 외곽지역도 꼭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카보 다 로카를 방문하시면서 신트라지역에 위치한 페냐 국립왕궁과 헤갈레이라 별장등도 여행하신다면 리스본을 듬뿍 느끼시고 오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