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의 마지막 날, 시간이 남아 별 기대 없이 스쿠터를 몰고 발리 남부로 향했습니다. 구글맵에서 찾은 사진만 보고 달리다 보니 다다른 곳에는 양쪽으로 절벽이 갈라지며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곳에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꾸따나 세미냑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곳도 아니었는데 발리를 떠나기 전날 이곳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던 판다와 비치(Pandawa Beach)였습니다.

절벽이 열리는 진입로, 신화가 걸어 다니는 길
판다와 비치는 일반적으로 "그냥 예쁜 해변"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진입로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저는 스쿠터를 타고 방문했고 매표소에서 입장료 15,000루피아를 지불했습니다. 매표소를 통과하고 나면 서서히 석회암절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게 되는데요. 이 절벽을 수직으로 깎아 도로를 낸 것이 2012년의 일이라고 하는데, 스쿠터를 타고 그 사이를 내려갈 때의 시각적 압박감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절벽 곳곳에는 감실(龕室) 안에 세워진 석상들이 있습니다. 감실이란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으로, 주로 종교적 조각상을 안치하는 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힌두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다섯 형제 판다와(Pandawa)와 그들의 어머니 쿤티(Kunti)의 석상이 그 안에 서 있었습니다. 단순한 관광용 조형물이 아니라, 신화적 서사가 절벽 위에 그대로 박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절벽사이로 난 길을 계속 운전해서 가다보면 절벽사이로 뻥 뚫린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는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멈춰있는데요. 절벽과 그 절벽을 따라 난 길, 그리고 바다가 오묘하게 섞여있습니다.
한 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구간에 야생원숭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 낚아채는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제가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주변에서 음료수를 빼앗기는 상황을 목격했고, 이후로는 원숭이가 근처에 있다면 가급적 스마트폰이나 귀중품을 원숭이가 보지 못하도록 주머니에 보관을 합니다.

와룽에서 밥먹고 썬배드에서 멍 때리기, 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길을 따라 쭉 내려오다 보면 많은 관광버스들과 차량, 스쿠터가 세워진 주차장이 나옵니다. 그곳에 주차를 하면 되는데요. 제가 주차했을 때는 따로 주차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주차 후 안쪽으로 걷다 보면 좌우로 길게 늘어선 와룽(Warung) 거리가 나옵니다. 와룽이란 인도네시아 현지 소규모 식당 또는 가게를 통칭하는 말로, 우리나라의 분식집이나 포장마차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야시장처럼 쭉 이어진 이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면 썬베드(sunbed)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음식 한 접시만 주문해도 자리를 잡고 눌러앉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고, 가격도 꾸따나 세미냑 대비 확연히 낮았습니다. 나시고랭(Nasi Goreng, 인도네시아식 볶음밥)과 코코넛 주스를 시켜놓고 바다를 바라봤는데, 너무나 평화로운 비치였습니다. 산호초 지대 때문에 파도가 세지 않고 물도 매우 깨끗하며 무엇보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관광객들이 많이 보였고 그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였습니다.
원래 방문할때는 잠깐 구경만 하다가 이동하려 했지만 선배드에 누워 바라보고 있으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발리 관광청 공식 자료에 따르면 발리 남부 지역은 석회암 지형 특성상 북부나 중부에 비해 개발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으로 분류됩니다(출처: Bali Tourism Board). 제가 느꼈던 "덜 개발된, 더 로컬스러운" 인상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카약과 물놀이, 장비 없이도 충분한 이유
판다와 비치의 바다는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직접 들어갔을 때 진가가 나옵니다. 앞서 언급한 산호초가 형성하는 천연 방파제 덕분에 해변 근처 수면은 파도가 높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이나 카약 같은 수상 레저 활동을 하는데 안전합니다.
판다와 카누(Pandawa Canoe)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카약 대여 서비스가 현장에서 바로 이용 가능합니다. 보통 1인용 또는 2인용 카약을 대여할 수 있으며, 비용은 1시간 기준 약 50,000 ~ 100,000 루피아 내외입니다. 한화로 약 4500원에서 9000원 정도입니다. 대여료에는 구명조끼가 포함되어 있으니 안전을 위해 반드시 착용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제 앞에서 카약을 타던 가족 중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는데, 부모가 옆에서 나란히 노를 저으며 꽤 멀리까지 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해변에서 오른쪽으로 노를 저어 가보면 깎아지른 절벽을 바다 위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이 나오는데 육지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압도적인 웅장함을 선사합니다.
수심도 전반적으로 완만합니다. 인도네시아 관광부 공식 자료에 따르면 판다와 비치는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안전 등급이 별도로 관리되는 해변 중 하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출처: Kementerian Pariwisata Indonesia).
오전 시간대를 공략하면 단체 관광버스가 도착하기 전이라 해변을 거의 전세 낸 듯 쓸 수 있습니다.
판다와 비치는 로컬의 느낌이 더 강하게 나는 장소입니다. 현지 관광객들도 꽤 보이고 다른 유명한 비치에 비해 가격도 저렴합니다. 번잡한 관광지에 지쳤다면, 혹은 발리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하루가 필요하다면 이곳이 그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스쿠터 한 대, 루피아 몇 장, 그리고 몇 시간의 여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