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피렌체나 웅장한 시에나와는 또 다른, 작지만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이 도시는 15세기의 어느 천재적인 교황이 설계한 '완벽한 도시였습니다. 토스카나 여행을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피엔차를 목적지로 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워낙 토스카나에는 가봐야 할 여행지가 많았기 때문인데요. 부모님과 함께하는 토스카나 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게 꼬이면서, 그냥 동선상 가장 효율적인 곳이어서 선택한 게 피엔차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하고 보니 이 작은 마을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지, 직접 발로 걸어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토스카나에서 딱 한 곳만 고른다면, 나는 주저 없이 피엔차
솔직히 처음 마을에 들어섰을 때 당황했습니다. 옆 도시인 몬테풀차노(Montepulciano)와 비교해도 확연히 작은 규모였고,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한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면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에 관광객이 정말 많았습니다. 피엔차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등재된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문화적·자연적 유산을 의미합니다. 피엔차 구시가지는 1996년에 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출처: UNESCO World Heritage).
마을 입구 쪽에는 작은 장터 같은 것이 열려 있었습니다.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도 제법 있었고, 골목 곳곳에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들이 이어지는 구조가 중세 이탈리아 도시 계획의 전형적인 형태인 이상도시(Città Ideale) 개념을 실제로 구현한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상도시란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인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기능과 미학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도시를 설계하려 했던 이념적 도시 계획 개념입니다. 교황 피우스 2세(Pope Pius II)가 자신의 고향인 코르시냐노를 이 개념에 따라 개조하여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피엔차입니다.
피엔차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숙소 위치인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를 어디로 정하느냐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아그리투리스모란 이탈리아 농촌 지역에서 운영되는 농가 민박 형태의 숙박 시설을 의미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예약을 너무 늦게 하면 외곽에 위치한 곳밖에 남지 않고, 그게 하루 동선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 결과 Chapel Vitaleta나 막시무스의 집(Villa di Massimo), Parco dei Mulini 피엔차 주변에 위치한 관광지들 위주로 여행을 했습니다.
성벽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발도르차 평원,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한지 알게 됐습니다
피엔차 성벽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전망대에 도달합니다. 저는 솔직히 전망대가 있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많이 좁은 골목으로 향하길래 따라가봤습니다. 그런데 골목끝에 위치한 전망대를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발밑으로 펼쳐지는 발도르차(Val d'Orcia) 평원은 경관 계획(Landscape Planning)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토스카나 전원 경관의 대표 사례입니다. 경관 계획이란 자연환경과 문화적 경관을 보전·관리하기 위한 체계적인 계획 행위로, 유럽 경관협약(European Landscape Convention)이 그 기반이 됩니다. 발도르차 평원은 그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출처: UNESCO Val d'Orcia).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들이 언덕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은 실제로 보면 컴퓨터 배경화면 이미지라고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입니다. 그 전망대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는데, 그게 이번 여행 전체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됐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아무 말 없이 그냥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간이었습니다. 바쁘게 유명한 곳들을 체크리스트 지우듯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런 한 순간이 훨씬 오래 남는다는 걸 제가 직접 경험으로 깨달았습니다. 만약 이 전망대를 모르고 지나갔었더라면 피엔차 여행은 반의 반도 인상깊게 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름조차 로맨틱한 골목길, '사랑'과 '운명' 사이를 걷는 시간
피엔차의 골목길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랑의 길(Via dell'Amore)', '운명의 길(Via della Fortuna)' 같이 이름 자체가 낭만적인 골목이 많고, 테라코타(Terracotta) 벽에 꽃화분들이 걸려 있는 풍경은 이탈리아 소도시 특유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테라코타란 점토를 빚어 저온에서 구운 붉은색 건축 재료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 전통 건축에서 외벽과 지붕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골목 구석구석의 작은 상점들에서 풍겨오는 고소하면서도 쿰쿰한 페코리노 치즈(Pecorino)의 향기는 이 길을 걷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미식 여행이자 축제로 만들어줍니다. 페코리노란 양젖으로 만든 이탈리아 전통 경질 치즈로, 피엔차 지역이 그 주요 산지 중 하나입니다.
'사랑의 길' 끝자락에서 다정하게 연인의 손을 잡고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뒷모습마저 피엔차가 빚어내는 풍경의 일부가 되는 곳. 이곳의 골목들은 단순히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바쁜 삶을 사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작고 소중한 감정들, 그리고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마법 같은 산책로였습니다. 치즈 가게 주인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볕이 잘 드는 계단에 앉아 쉬어가는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피엔차라는 도시는 토스카나를 이해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피엔차가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이상 도시 개념의 실현이라는 것, 그리고 발도르차 평원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두 번 인정받은 지역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무게를 이 마을에 실어줍니다. 그 역사적 맥락을 알고 걸으면 좁은 골목 하나도 다르게 보입니다.
피엔차 한 곳만 여행한 게 아쉬울 수도 있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내서 여러 곳을 찍고 지나치는 것보다, 한 곳에서 전망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부모님과 발도르차 평원을 바라보던 그 시간이 훨씬 진한 기억으로 남았으니까요. 토스카나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아그리투리스모 예약을 먼저 하고, 그 위치를 기준으로 피엔차를 포함한 동선을 짜시는 것을 권합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준비한 만큼 더 많은 것을 가져올 수 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