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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비타 디 반뇨레쪼 (천공의성, 죽어가는도시, 여행팁)

by unknowntrip 2026. 4. 13.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시비타 디 반뇨레쪼(Civita di Bagnoregio)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애잔한 아름다움을 가진 곳입니다.
침식으로 인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어 '죽어가는 도시(La città che muore)'라는 슬픈 별명을 가졌지만, 그만큼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찰나의 미학이 가득한 곳입니다.
저는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길에 들르는 곳'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에서 토스카나를 여행하고 내려오는 길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정에 끼워 넣었으니까요. 그런데 안개 속에 떠 있는 마을을 처음 마주한 순간,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비타 디 반뇨레쪼, 이름도 낯선 이 작은 마을이 제 토스카나 여행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안개 속에 떠 있는 마을, 천공의성이 실재한다면

저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꽤 많은 성과 고도를 돌아봤습니다. 체스키 크룸루프도 가봤고, 슬로베니아의 블레드성,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성도 걸어봤습니다. 그런데 시비타 디 반뇨레쪼의 첫인상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반뇨레쪼 마을 전망대인 벨베데레에 서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순간, 멍한 상태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마을은 응회암(Tufa) 지층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응회암이란 화산 폭발 시 분출된 화산재와 암석 파편이 굳어서 만들어진 퇴적암으로, 가볍고 무른 성질 때문에 침식에 특히 취약합니다. 수천 년에 걸쳐 비바람이 이 지층을 깎아내면서 지금과 같은 거대한 단층 절벽이 형성된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날은 비가 내리고 운해가 짙게 깔려 있었는데, 절벽 아래를 감싼 구름 때문에 마을만 공중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천공의 성 라퓨타'를 구상할 때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바로 느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약 300미터에 달하는 보행교를 건너야 합니다. 이 다리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보행 전용 교량으로, 바람이 거센 날에는 다리 위에서 꽤 아찔한 기분이 듭니다. 다리를 건너는 내내 발아래로 협곡이 펼쳐지고, 맞은편에는 성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긴 다리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현대 문명과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저만의 감상은 아닐 것입니다.
에트루리아 문명(Etruscan Civilization)이 처음 이 터를 잡은 것은 약 2,5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에트루리아 문명이란 로마 제국 이전, 기원전 8세기부터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 민족의 문화를 일컫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바위 위에 사람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사라지기에 더 아름다운 곳, '죽어가는 도시'를 걷다

시비타 디 반뇨레쪼에는 '라 치타 케 무오레(La città che muore)', 즉 '죽어가는 도시'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꽤 냉정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응회암 지층의 끊임없는 침식 작용으로 인해 마을의 가장자리 절벽이 매년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마을 면적은 2,5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탈리아 문화부(Ministero della Cultura)는 이 지역을 문화유산 위험 지역으로 지정하고 지속적인 보존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출처: 이탈리아 문화부).
성문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생각보다 훨씬 조용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몇몇 기념품 상점과 작은 식당이 문을 열고 있었을 뿐, 실제 주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재 상주 인구는 채 10명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을이 운영되고 있다기보다, 마을이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폐허에 가까운 풍경이 주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돌담 틈새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무너진 벽 위에 올려진 작은 화분.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허락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모습이, 사람 사는 이치와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감상이 좀 거창하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실제로 절벽 끝에 서서 협곡을 내려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찾아옵니다. 그건 제가 꾸며낸 게 아니라 진짜 그랬습니다.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도 등재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지속가능한 문화유산 보전의 관점에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출처: 유네스코). 지금도 진행 중인 침식을 고려하면, 지금 가지 않으면 몇십 년 뒤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여행지가 '아무 때나 가도 되는 곳'이라기보다는 '지금 가야 하는 곳'에 가깝다고 봅니다.

시비타 디 반뇨레쪼 여행팁

저는 렌트카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반뇨레쪼 마을 입구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시간 30분짜리 티켓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걷기 시작하니, 마을 입구에서 시비타 디 반뇨레쪼 전망대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훨씬 멀었습니다. 결국 주차 요금 벌금이 걱정돼서 마을 내부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돌아나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입구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망대 바로 근처에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자동차 여행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ZTL(Zona a Traffico Limitato)입니다. ZTL이란 이탈리아 도심 내 차량 통행 제한 구역을 의미하며, 허가받지 않은 차량이 진입할 경우 수십 유로에서 수백 유로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됩니다. 렌트카 업체를 통해 나중에 청구되는 경우가 많아 여행 후 한참 뒤에 날아오기도 합니다. 반뇨레쪼 역시 마을 내부 일부 구간에 ZTL이 적용될 수 있으므로, 진입 전 표지판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마을 입장료는 5유로이며, 다리 입구 매표소에서 현장 구매가 가능합니다.
마을 내부 바닥은 수백 년 된 울퉁불퉁한 돌길로 이루어져 있어, 굽 있는 신발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비 오는 날은 특히 다리를 건널 때 미끄럽습니다. 편한 운동화를 신으시길 추천드립니다.
아침 일찍 방문하면 운해를 볼 확률이 높고, 해질 무렵에는 화산암 절벽이 붉게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을 자체가 크지 않아 내부를 둘러보는 데는 30~40분이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더 필요한 건 전망대에서 마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그 시간입니다. 저는 그게 이 여행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와 토스카나를 함께 여행하는 루트라면, 그 중간 경로에 시비타 디 반뇨레쪼가 위치합니다. 일부러 따로 시간을 내야 하는 여행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들를 수 있는 위치라는 점에서 이 여행지의 진입 장벽은 생각보다 낮습니다. 단, 주차는 미리 동선을 파악해두어야 저처럼 헛걸음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을 안을 걷는 것도 의미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편 전망대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여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완벽한 준비 없이도, 그냥 한번 서서 바라보는 것. 그게 시비타 디 반뇨레쪼를 제대로 여행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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