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처음 스위스 융프라우 여행을 계획할 때 벵겐이라는 마을의 존재를 거의 몰랐습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처럼 라우터브루넨이나 그린델발트 쪽에 숙소를 잡으려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때 벵겐을 선택한 게 이 여행 전체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두 번의 융프라우 여행, 두 번 모두 벵겐에 머문 이유를 지금부터 풀어드리겠습니다.

융프라우에서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 차없는마을, 벵겐
저는 두번의 융프라우 여행을 하면서 두번 모두 벵겐이라는 마을에서 2박을 했었습니다. 그만큼 다른 마을에 비해서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벵겐에 도착하게 되면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무언가 다르다는 걸 바로 느끼게 됩니다. 엔진 소리가 없었습니다. 라우터브루넨에서 톱니바퀴 열차(Rack Railway)를 타고 올라오면 닿는 벵겐은, 해발 1,274m 고원 지대에 자리한 카-프리(Car-free) 마을입니다. 여기서 카-프리란 말 그대로 자동차 통행이 전면 금지된 마을을 뜻하는데, 단순히 교통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의 분위기 자체를 바꿔버리는 요소입니다.
처음에는 '차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그 반대였습니다. 해질녘 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낮게 깔린 구름이 샬레(Chalet) 지붕 사이로 흘러가고, 가로등 불빛과 뒤섞이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거기에 소들의 카우벨(Cowbell) 소리, 쉽게 말해 소 목에 달린 금속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그게 알프스 힐링의 정체구나 싶어집니다.
마을은 생각보다 많이 작습니다. 천천히 여유롭게 산책을 해도 30분에서 1시간이면 충분하고 마을 중앙의 교회 앞 언덕에서는 라우터브루넨계곡과 쏟아지는 폭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마을 중심부에는 벵겐에서 맨리헨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승강장이 위치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벵겐은 생각보다 마을 규모가 작습니다. 슈퍼마켓, 식당, 편의시설 모두 라우터브루넨이나 그린델발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저는 두 번 모두 인터라켄의 대형마트 COOP에서 미리 식재료를 구입해 숙소에서 직접 요리해 먹었습니다. 이 준비를 안 하고 올라왔다면 식사 때마다 꽤 고생했을 겁니다. 벵겐을 숙소로 선택하신다면 이 부분은 반드시 체크하고 올라오시기를 권합니다.
벵겐에서 맨리헨으로, 융프라우 VIP패스로 케이블카 탑승
첫 번째 융프라우 여행 때는 맨리헨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당시에는 융프라우 VIP패스(Jungfrau VIP Pass) 적용 구간이 아니었습니다. VIP패스 가격만 해도 꽤 비싸기 때문에 여행경비가 부족해서 건너뛰었었습니다. 여기서 융프라우 VIP패스란 융프라우 지역의 주요 교통수단과 전망대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통합 교통권을 말하는데, 포함 구간이 시즌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어서 사전 확인이 필수입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맨리헨이 패스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제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습니다.
벵겐에서 맨리헨 정상까지 이어지는 LWM 공중 케이블카(Luftseilbahn Wengen-Männlichen)는 단 5분 안에 고도 약 1,000m를 수직으로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공중 케이블카란 지면에 고정된 레일 없이 공중에 매달린 와이어로 운행되는 방식으로, 지형의 굴곡 없이 수직에 가까운 경로를 오를 수 있는 게 특징입니다. 케이블카가 출발하고 벵겐 마을이 점점 작아지면서 아이거 북벽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순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제 눈으로 마주하는 건 차원이 달랐습니다.
최근에는 로열 라이드(Royal Ride)라는 야외 테라스 옵션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케이블카 지붕 위에 마련된 야외 공간에서 유리창 없이 알프스의 바람과 풍경을 그대로 마주하며 올라가는 방식인데, 추가 요금이 발생하더라도 경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진이나 영상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이 옵션은 거의 필수에 가깝습니다. 저라면 무서워서 못할 것 같긴 합니다.
케이블카 동선도 잘 짜여 있습니다. 벵겐에서 올라가 맨리헨을 둘러본 뒤, 반대편 그린델발트 방향으로 내려오는 루트가 가능합니다. 내려가는 길에는 초원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떼와 카우벨 소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이 이동 자체가 또 하나의 풍경이 됩니다.

맨리헨 정상에서 알프스 삼형제를 마주하다
해발 2,222m의 맨리헨은 알프스 삼형제라 불리는 아이거(Eiger), 묀히(Mönch), 융프라우(Jungfrau)를 가장 정면에서, 그리고 가장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입니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정상이 해발 3,454m로 더 높긴 하지만, 거기서는 오히려 산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라 전체 실루엣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맨리헨에서는 세 봉우리의 형태와 설선(雪線), 즉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경계선이 한눈에 들어와서 오히려 산의 스케일을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정상에는 로열 워크(Royal Walk)라고 불리는 완만한 산책로가 있고, 끝에는 왕관 모양의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걷는 데 크게 힘들지 않아서 체력에 자신 없으신 분들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맨리헨에서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까지 이어지는 파노라마 트레일(Panorama Trail)도 있는데, 평탄한 능선을 걸으며 아이거 북벽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가는 코스라 하이킹을 좋아하시는 분께 특히 추천합니다.
맨리헨을 여행 동선에 포함할 때 참고할 핵심 체크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융프라우 VIP패스 포함 여부를 사전에 공식 홈페이지 또는 SBB 모바일 앱으로 확인할 것
- 케이블카는 봄 정기점검으로 4월 20일 전후부터 5월 하순까지 운행 중단되는 경우가 있음
- 로열 라이드(야외 테라스) 좌석은 현장에서 추가 구매 가능
- 벵겐 >맨리헨 > 그린델발트, 혹은 순서를 반대로 루트를 이용하면 동선 효율이 높아짐
- 산장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서 아이거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은 강력 추천
스위스 연방 통계청(FSO)에 따르면 스위스 알프스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연간 약 1,100만 명 이상으로 집계되며, 그 중 융프라우 지역이 가장 높은 방문 비중을 차지합니다(출처: 스위스 연방 통계청). 그만큼 성수기에는 케이블카 대기 시간이 상당히 길어질 수 있으므로 오전 일찍 이동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융프라우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2박 3일은 필요합니다. 인터라켄에서 당일치기로 융프라우요흐만 다녀오는 일정으로는 이 지역의 절반도 못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도 두 번 모두 2박 3일을 머물렀는데, 그래도 '이번엔 저기를 못 갔다'는 아쉬움이 남았을 정도입니다.
고산 지대 여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고산병(AMS, Acute Mountain Sickness)인데, 여기서 AMS란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소 분압이 낮아져 두통, 메스꺼움, 어지럼증이 발생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융프라우요흐처럼 해발 3,000m 이상을 오를 때는 이 증상이 발생할 수 있으니,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것처럼 충분한 수분 섭취와 급격한 고도 상승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맨리헨 정도의 고도에서는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지만, 벵겐에서 이틀 정도 적응하고 나서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게 몸에 훨씬 편했습니다.
벵겐이든 맨리헨이든, 이 지역은 '보는' 여행이 아니라 '느끼는' 여행에 가깝습니다.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기보다는 벵겐 골목을 한 번쯤 목적 없이 걸어보시고, 맨리헨 정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바람을 맞아보시기를 권합니다. 그게 이 여행에서 제가 가져온 가장 좋은 기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