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유레일패스가 없었다면 리기산은 제 여행 계획에 없었을 겁니다. 유레일패스 티켓을 가지고 있다면 리기산으로 향하는 유람선과 산악열차를 모두 이용할 수 있어서 시내를 구경한 다음 날 아침,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루체른 호수를 가르는 유람선 위, 유럽 최초의 산악열차, 구름 위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는 그 순간까지. 모든 순간이 하나하나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유레일패스로 여행중이라면... 유람선타고 리기산으로
아침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설렜습니다. 유람선을 타러 간다는 것 자체가 기차역을 향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고, 날씨도 그날따라 유독 맑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유레일패스(Eurail Pass)로 유람선까지 탈 수 있냐고 의아해하십니다. 여기서 유레일패스란 유럽 내 철도와 일부 수상 교통망을 아우르는 통합 승차권으로, 지정된 항로를 운항하는 선박까지 커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루체른 호수 유람선이 바로 그 대상입니다.
이 유람선이 패스 적용이 가능한 이유는 단순한 관광 선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체른 호수의 정식 명칭인 피어발트슈테터 호수(Vierwaldstättersee)는 스위스 연방 탄생지인 뤼틀리 평원을 품은 역사적인곳이며, 호수 주변 마을들을 잇는 국가 교통망의 일부로 운영됩니다. 1837년 증기선 슈타트 루체른(Stadt Luzern)호로 시작된 이 항로는 지금도 180년 이상의 항해 역사를 잇고 있습니다.
루체른 기차역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 선착장이고 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Vitznau) 선착장으로 향하게 됩니다.
유람선 타고 이동 시 선내에만 있으면 손해입니다. 제가 직접 타보니 갑판 바깥으로 나가야 비로소 이 여행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호수 경관은 기차 창문으로 보는 풍경과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유럽 최초의 산악열차, 비츠나우에서 리기 쿨름까지
유람선이 비츠나우(Vitznau) 선착장에 닿으면 바로 눈앞에 산악열차 승강장이 보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이 루트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리기산 산악열차는 1871년 5월 21일에 개통된 유럽 최초의 산악 철도입니다. 공학자 니클라우스 리겐바흐(Niklaus Riggenbach)가 고안한 래크 앤 피니언(Rack and Pinion) 방식, 즉 리겐바흐 시스템(Riggenbach System)이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래크 앤 피니언 방식이란 선로 중앙에 톱니 모양의 레일을 깔고 열차 하부의 톱니바퀴가 그 레일과 맞물려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반 점착식 철도로는 오를 수 없는 급경사 구간을 주행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입니다.
제가 창밖을 바라보며 실감한 것은 이 경사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올라갈때는 반드시 앉던지 서서 가야한다면 손잡이를 붙잡고 가야 합니다. 수직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의 기울기를 열차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가는데, 발아래로 루체른 호수가 점점 작아지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르트 골다우(Arth-Goldau) 방면에서도 다른 방식의 산악열차가 올라온다는 점입니다. 비츠나우 노선의 성공에 자극받은 인근 지역이 아프트 시스템(Abt System)이라는 별도의 톱니바퀴 방식을 도입해 정상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프트 시스템이란 래크 레일의 톱니 간격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해 더 안정적인 맞물림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리겐바흐 시스템과는 설계 철학이 다릅니다. 덕분에 리기산은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산악철도 방식이 하나의 정상역에서 만나는 독특한 이력을 갖게 됐습니다.
산들의 여왕, 리기 쿨름 정상에 서다
정상역인 리기 쿨름(Rigi Kulm)에서 비석 앞에 섰을 때, 왜 이 산이 '산들의 여왕(Regina Montium)'이라 불리는지 바로 이해가 됐습니다. 제가 직접 그 자리에 서보니 험준하고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주는 위압감이 아니라, 부드러운 능선이 호수들을 천천히 감싸 안는 형세였습니다. 다른 알프스 봉우리들이 가진 서늘한 긴장감과는 달리, 리기산은 인자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습니다.
360도 파노라마 전망이 열리는 이 정상은 역사적으로도 특별한 장소입니다. 1816년에는 스위스 최초의 산정 호텔인 리기 쿨름 호텔이 지어지며 유럽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필수 코스가 됐습니다. 그랜드 투어란 17~19세기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교양과 견문을 쌓기 위해 유럽 각지를 순방하던 성인식 같은 여행 관습을 뜻합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가 이곳의 빛에 매료돼 '푸른 리기(The Blue Rigi)'를 남겼고, 마크 트웨인은 일출을 보러 왔다가 일몰을 보고 감탄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리기 쿨름 정상 비석 앞 광장에서는 루체른 호수, 추크 호수, 로어 호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베른 알프스 봉우리들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정상부에 식당과 카페가 있어 식사나 음료를 즐기며 전망을 감상하기에 충분합니다.
스위스 국가 관광청 자료에 따르면 리기산은 연간 방문객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스위스 대표 산악 관광지이며, 산악열차와 유람선을 연계한 루트가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소개됩니다(출처: 스위스 국가 관광청).
올라갈 때는 저도 체력과 시간을 아끼느라 산악열차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일부 구간을 걸어서 내려가 봤고, 그게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이킹 루트는 산악열차 노선과 나란히 이어져 있어 방향을 잃을 걱정이 거의 없습니다. 관광객 중에는 아예 전 구간을 하이킹으로 오르내리는 분들도 계신데, 경사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올라갈 때보다는 내려올 때 일부 구간만 걸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단, 등산화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운동화를 신어야 합니다. 샌들이나 슬리퍼로는 미끄럽고 발바닥 부담이 심해집니다.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은 열차 안에서 보던 것과 또 다릅니다. 초원과 소 방울 소리, 발아래로 펼쳐지는 루체른 호수의 모습은 산악열차 유리창 너머의 그것과는 질감 자체가 다릅니다. 스위스 국립 지형 정보원(Swisstopo) 지도 기준으로 리기 쿨름에서 비츠나우까지의 하이킹 루트는 약 7km로, 내려오는 데 평균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정도 소요됩니다(출처: Swisstopo).
제가 직접 걸어보니 중간 지점인 리기 슈타펠(Rigi Staffel) 부근의 능선 구간이 가장 조망이 좋았습니다. 그 지점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호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루체른 시내는 하루면 주요 명소를 둘러보기에 충분한 규모입니다. 카펠교(Kapellbrücke)와 구시가지를 오전에 보고 나면 오후 시간이 남는 경우도 많은데, 그 남는 시간을 리기산 당일 루트로 채우기를 적극 권합니다. 유레일패스 하나로 유람선부터 산악열차까지 커버되니, 교통비 부담 없이 스위스 여행의 밀도를 한층 높일 수 있습니다. 비용이 아깝지 않은 날을 만들고 싶다면, 루체른에서 리기산으로 향하는 아침 유람선에 오르세요